추억 속으로
뭉실뭉실 익어가는 황금 빛 늙다리 호박은
둥근달 보다 빛나고
텃밭에 빨간 주머니들을 가득 달고 힘겹게 버티고 있던
고추나무들은 서리를 맞고 시들어 가고
초가지붕 위에서는 하얀 박이 주렁주렁 열러
초가지붕과 사랑에 푹 빠져 있을 무렵
그 때쯤이면 계절도 무르익어 또 다른
계절이 다가왔다.
나는 어린 시절 가을의 기억 보다 겨울을 좋아했던
아이 여는지 겨울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것은
얇은 옷에 구멍 난 양말 사이로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며 보내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을 어귀 바닥까지 얼어붙은 제법 큰 도랑은
어린 우리들의 겨울 천국이었다.
얼음판 위로 팽이들은 고사리 손 채찍이 매서워
어지러운 줄 모르고 핑핑 돌았고
형아 들이 만들어 온 철사 줄 스케이트는 어린 우리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 이었다
거북이 등처럼 터버린 손등에 미제 와세린 연고를
투박한 손길로 발라주던 엄마의 손길이 기억나는 겨울의 나날들
밤하늘 별들도 얼어 터져버린 동짓날은
붉은 팥죽 끊이는 소리에 하현달도 잠들어 졸고 있을 때.
가난에 멍든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어머니의
한숨 소리를 들어 면서 겨울밤은 깊어만 갔지만
그저 가난이 무엇인지 궁핍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던 시절 겨울은 추억보다 아픔이었다.
문풍지 틈새로 보이는 발가벗은 겨울나무는 어린 나에게는
아픔의 대상이었지만 나 하나의 몸을 녹이기에 겁겁했던 겨울
윽박지르는 칼바람 소리도 서릿발 솟은 새벽 찬 공기도 그저 무심히
지나가는 세월 이었다.
새삼 그 추웠고 험한 시절의 겨울이 그리운 건 무엇 때문인지
살아오면서 과거를 매달고 현재로 이어온
꽁꽁 묶은 끄나풀이 느슨해졌는지 너무 편하고 풍족하게
누리는 오늘의 삶에 내 영혼이 만족이라는 늪에 빠져 버렸을까
아니면 별 볼일 없는 한 중년의 실없는 넋두리 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심코 멀어져 가는 세월 탓인지 모른다.
그 시절 추억들이
해질 무렵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피어나는 것은
차가운 섣달 밤 밑동이 잘린 볏단들이 누워있는 논두렁에
그루터기 상처를 하얀 달빛이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보고픈 것이다.
추억은 상처도 남기지만 그 아름다운 흔적 속에
상처를 싸매며 치유하는 기억도 있기 때문이다.
세월은 그렇게 우리를 여기가지 대려 왔고 지금도 어디론가
같이 가자한다.
세월은 흘러도 추억의 시간은 멈추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생에서 멈추어진 시간을 추억이라 하지 않던가.
언제까지 지난날들을 기억하면서 살아갈지 모르지만
내가 만약 기억하지 못한다 하여도 추억은 그대로 살아 있을
것이다.
해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