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들에서/해량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금
언젠가 거닐던 겨울의 들녘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나무들이 아직 잎은 다 버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겨울이 그리운 것은
지금 나의 마음이 겨울에 살고 있기 때문 일거다.
그 곳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식어 버린 농부들의 땀을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얼음을 덮어 쓴 바위들은 근엄하고 침묵했다
길섶에 누워있는 색 바랜 풀들은 질서 없이
어느 화가의 낙서처럼 그려져 있었다.
화려했던 가을
황금빛 나락들이 가득했던 들을 지키던 그는
갈기갈기 찢긴 누더기 옷을 입고
칼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는지
그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들에서
무엇을 지키려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는지.
한 때는 들을 지키던 영웅이었는데
계곡을 타고 작은 도랑에 도착한 물은
하얀 거품을 일구고 사르르 얼어붙었다
갈대숲 언저리에 작은 집을 짓고 살던
들쥐들이 따스한 햇살이 그리워 고개를 내밀 때
그들을 노리는 또 다른 그들이 있었으니
겨울들은 먹이사슬 질서가 분명했다.
농부의 손길이 미처 닫지 못한 작은 공간에는
낯설지 않은 참새들이 몰려 와 한바탕 축제를 열었다
그들이 겨울들의 주인이었지
아무 대가를 치려지 않고 넓은 들에 무혈입성 한
그들의 축제는 언제 끝이 났는지 궁금하다
겨울들녘이 그립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한 겨울들을 걷고 싶다
가을비가 내리는 오늘이면 무엇 하리
내 가슴속에 가득히 자리 잡고 있는 허수아비 그가 없는데
겨울이 오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해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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