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허주
오래 만에 산길을 걸었다
가을날들을 보내버린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들이
애처롭다 여름에 그렇게들 화려한 옷을 입고 온갖 폼을 다 잡더니
나무들도 세월의 위력은 이기지 못하고 찬바람이 황량하게
불어 닥치는 언덕에서 이름 없는 골짜기에서 처량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어쩌면 지금 나 아니 우리들의 모습과 같은 것 같아서
측은해 보이고 동질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어느 골짜기를 지나다 계곡의 지형이 완전히 변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날 보았을 때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물가의 돌무덤 사이에는 피라미들과 개구리들이 무리지어
헤엄치고 버들강아지 숲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며
놀고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계곡은 사라지고 넒은 도랑으로
변해 있었다.
지난 해 집중 호우 때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정말이지 불은 재를 남기지만 물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경봉스님의 물처럼 살거래이라는 그 법문이 떠오른다.
물처럼 살거래이,
만물을 살리는게 물인기라.
제 자리를 찾아 쉬지 않고 나가는게 물인기라.
어려운 구비를 만날수록 더욱 힘을 내는게 물인기라.
맑고 깨끗하여 모든 더러움을 씻어 주는게 물인기라.
넓고 깊은 바다를 이루어 고기를 키우고 되돌아
이슬비가 되는게 바로 물이니, 사람도 이 물과 같이
우주만물에 이익을 주어야 하는 기라.
물처럼 살거래이,
물처럼 사노라면 후회 없을기라.....
스님의 말씀처럼 물처럼 살 수 있을까
사람의 몸은 70%가 물이니 이미 사람은 물이라 해도 될 뻔한데
사람이 물처럼 살지 못 하는 것은 화를 부르는 욕심 때문이리라
돈 명예 권력 있을 때에는 그들이 사는 곳이 천국일진데 그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날 그들이 갈 곳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물속의
고기밥이 되어야지 어디로 갈 수 있다 말인가
물처럼은 살지 못해도 신선한 공기가 되지는 못해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살아가야 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함이
너무 안타까워.
산속은 너무 조용했다
그곳에도 생명들은 굼틀 그렸고 질서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는 이 사회는 정의와 질서는 언제 쯤 똑바로 설까
산속에서 만났던 그 이름 모를 새들과 나무들이 그리워서
언젠가 또다시 그곳에 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