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마을

소리꽃

해량 2012. 10. 18. 22:37



소리꽃/조영민


나팔꽃이 햇살 한 모금 길게 연주를 하는 공원 벤치

언제부터 소리가 주식이었을까, 저 비둘기들
소리에 저렇게 배가 고팠다니, 잘 데워진 공원 한켠에서
길거나 짧은 음표로 늦은 공복을 수선하고 있다

한낮의 태양이 나른하고 미지근한 바람과 앙상블로
나팔꽃을 연주하는 그 곁에서
생의 무대를 막 은퇴한 곱슬머리 지팡이 하나가
뒤틀린 몸으로 까마득히 졸고 있는 한낮, 그러나 소리들은
우리의 방심을 틈타 오후보다 빨리 시들곤 했고
가끔은 잘 열리지 않는 기억의 틈바구니에서
시든 악보 한 송이 불협화음의 세월을 견디기도 한다
한 소리가 지고 나면 다른 소리가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지
해마다 오월이면 우리의 망각 속으로, 소리들이 피어난다

저, 앙상하고 질긴
엽록의 덩굴들이 퍼 올리는 소리는 어떤 음계일까, 나 오늘
저녁 바람이 모두 소화불량에 걸린 것도 잊은 채
푸르거나 붉은 음계들 몇, 오래 듣고 있다



가을史/조영민


카드를 슬쩍 바꿔치기한 날씨였다
골목을 나서면 옷을 차려입은 바람이 달려왔다
바람의 근육에서 향수가 느껴질 때
내가 바람의 지인 같았다
하늘은 노름판이어서 꼭 패를 맞춰보고 싶었다
구름은 오후에 맞춰 보아야할 패였지만
아침부터 돌렸다 나는 밤보다 아침에 잃은 게 많았다
길이나 태양을 까면 빈껍데기뿐이었다
날마다 시간은 패를 돌리지만
내가 애인처럼 데리고 들어가는 고독도
짜고 쳤다
돌 틈에 꽃이 만발하고 냇물에 간밤 별들의 겨드랑이 냄새가 날 때
판을 뒤엎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미리 본 것들이다 뒤돌아보면
마을이라는 것은
산들이 카드 패를 즐기다 오줌을 누러 일어선 자리
집을 하나하나 엿보면 빈 카드나 들고 있다
오래 전부터 남은 패를 들고 있던 아버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식구들은
밥상에 패를 놓지만 아버지는 끝내 내놓지 않았다
보여주지 않는 것은 다 보여준 걸 알기 때문이라는 걸 모르고
아버지는 남은 패를 모종에 맞추곤 했다
아침이면 패가 돌아가고 내놓을 패가 없어지자
자리에서 우리를 털곤 했던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의 새 카드 패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25회 현대문학 당선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