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이의 저녘 만찬
지연이의 저녘 만찬
"아… 배 고파. 엄마, 뭐 먹을 것 좀 없어요?”
오늘도 밤 10시가 넘어서야 학교에서 돌아온 지연이는 책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어젖히며 수선을 피웠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먹으면 뭐든지 다 살로 간댄다. 좀 참지 그러니?”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지연이는 결국 커다란 양푼에 밥을 한 가득 담아
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비비기 시작했다.
참기름에 김부스러기까지 얹어 완성된 비빔밥은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갈 정도록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엄마도 좀 드실래요?”
한 술 가득 떠서 입으로 가져가다가 불쑥 숟가락을 내미는 지연이.
“너나 많이 먹으렴….”
딸아이의 저녁 만찬이 계속된 지 벌써 두 달째이다.
전에는 매일 두 개씩 가져가는 도시락도 남겨와서 걱정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싹싹 비워 오는가 싶더니 급기야 매일 저녁, 한 끼의 식사를 더 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이어트를 한다며 오후 여섯시 이후에는 사과 한 조각 안 먹으려 했던 아이였기에
그런 변화가 더욱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그만큼 공부가 고된 것일까.
갓 피어난 꽃잎처럼 한창 싱그러워야 할 나이에 밤 늦도록 책상 앞에 앉아
딱딱한 수학공식과 지겨운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을 딸아이가 애처로워
가슴 한 구석에 뜨거운 것이 밀려들었다.
“엄마, 왜 그래요?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연이가 걱정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아, 아니야. 잠시 네 생각을 했어.”
나는 얼른 일어나며 딸아이의 가방에서 빈 도시락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 도시락의 뚜껑을 여는 순간, 작은 쪽지 하나가 툭 떨어지는 게 아닌가.
“어머니, 고맙습니다.”
쪽지 겉면에 쓰여져 있는 꼭꼭 눌러 쓴 글씨. 분명 딸애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쪽지를 펼쳐 보았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지연이 친구인 희정입니다. 그 동안 제 도시락까지 싸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편지로 대신하는 걸 용서해 주세요.
처음에는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저도 언젠가는 나누면서 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지연이가 하루에 네 끼를 먹으면서도 오히려 핼쑥해져 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랑스런 내 딸은 학교에서 수학공식과 영어단어 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더 중요한 것들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 이명수/서울 마포구 서교동/낮은울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