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상추에 붙어 있는 기억
파란 상추에 붙어 있는 기억
슬픈 소풍의 기억이 하나 있다.
그 남자 아이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소풍 때문에 전반적인 슬픔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소풍은 그 아이를 기억하는 나의 슬픔에 대한 하나의 소품일 뿐이다.
그 아이는 태양이 한낮의 운동장과 철봉을 뜨겁게 달구던 그 해 초여름에
전학을 왔다. 전라북도 산골짝에서 전학을 온 그 애는 이상하게도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촌스런 옷태, 꾸불텅한 사투리를 구사하리라
예감했던 아이들에게 그 아이는 고르게 배열된 하얀 이빨의 미소를 보여 주었다.
나는 그때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사람은 왜 죽어야만 하는가?
죽어서 몸이 썩을때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까?
관 속에서 숨이 막히지는 않을까?
내가 죽은 후엔 어디로 갈까?
그리고 우주보다 더 큰 차원은 존재할까?
끝도 없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 4학년의 여자 아이를 숨막히게 만들었다.
숨통을 조여오는 의문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건
인간 대접받기 틀린 노예들의 부질없는 하역 같았다.
그 아이는 나의 고단한 고민과는 무관하게 학교 생활에 잘 적응했다.
그런 그 애가 얄미운 건 당연했다. 몇몇의 짓궂은 아이들이 그 아이의 약점을
골라 툭툭 건드렸지만 그때마다 그 아이는 그들의 공격을 시원스럽게 잘 받아
쳐 버렸다.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날, 체육시간이 끝나고 수돗가로 달려간
나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 아이가 손에 비누 거품을 묻히고 찬란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니?"
"응, 이 색깔. 정말 이쁘지 않니?"
"무슨 색깔?"
"이 비누 거품 색깔."
"..."
"때를 씻어 주는 이 비누 거품 색깔이 좋아."
일순 그 아이의 몸에 현실의 차원이 아닌 빛무리들이 떠도는 것 같은 착시가
일었다. 때를 씻은 비누 거품의 색깔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구나. 그 아이가
나의 고민을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여름 방학이 시작됐다.
나는 매일 뚝방에 올라, 터져버림 댐처럼 줄줄 새는 고민들에 휩싸여 하루를
보냈다. 왜 전쟁이 일어나야 하고 사람들은 서로를 죽여야 할까? 왜 개미들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밟는 구두에 짓이겨져 죽을까? 깊은 바다의 가장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름 내내 하늘은 멍이 든 것처럼 아픈 색깔을 띄고 있었다. 나는 하혈을 하는
것 같은 태양이 빛살을 추스려 저녁으로 물러나면 열사병을 앓은 아이처럼
바싹 마른 입술로 힘없이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 뚝방에서 우연히 그 아이를 만나게 됐다.
"너 이 동네 사니?"
"어, 저 뚝방 끝에 살아."
"너 죽은 다음 어떻게 될 지 생각해 봤어?"
"...난 사는 거 생각하는 것도 힘들어"
그날 나는 그 아이가 사는 뚝방 끝의 판자촌에 갔다. 레이션 박스와 판자로
얼기설기 지어진 집들 사이로 삶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애는 4남매의 첫째였다. 아버지가 3년전 몹쓸 병에 걸려 돌아가시고 난 후
서울로 돌아온 어머니가 장안동의 가발 공장에서 일하시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방학동안 그 아이는 동생들과 함께 봉투도 접고 인형 눈알도
많이 붙였다고 했다. 인형 눈알을 얼마나 많이 붙였는지 머리가 빙빙 돌 것
같았다며 손가락을 동그랐게 말아 눈에다 대고 빙빙 돌렸다.
끝도 없이 풀리지 않던 존재록적인 고민을 안고 판자촌의 누추한 방에 앉아
고추장에 밥을 비벼 주는 그 아이를 바라보던 나는 웬지 모르게 속이 상했다.
엉엉 울고만 싶었다. 어디론가 사라져서 숨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여름 방학이 끝났다.
맹렬하게 타올랐던 여름이 사그러들고 가을이 사뿐히 내려앉은 후 나는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모친은 여름내내 속을 끓이던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행동을 하자, 안심을 하시며 소시지와 계란말이로 점철된 특제 도시락을
싸 주셨다. 나는 그럭저럭 4학년짜리 여자 아이가 가을에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평범하게 치뤄 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늘 밝은 미소를 띄고 다니던 그 아이가 점심 시간마다
없어지는 것이었다. 촐랑촐랑 잘 돌아다니는, 친구가 많은 아이였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 아이 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했고 판자촌에서 삶의 궁색함을
목도한 나만 안절부절 못했다. 며칠 동안 점심 시간에 그 아이를 보지 못한
나는 학교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다 그 수돗가에서 그 아이를 발견했다.
"집에 무슨 일 있니?"
"어머니가 아프셔."
난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뱃속의 가장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북받쳐 올랐다.
'내가 과연 뭘 도와줄 수 있을까? 죽음보다도 삶이 이렇게 어렵구나..'
<하늘이 두쪽이 나고 폭우가 쏟아져도 요번 가을 소풍은 갑니다.>
선생님의 말이 씨가 됐는지 하늘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얼마간의 망설임 끝에 그 아이의 도시락을 함께 쌌다.
이걸 어떻게 건네줄까. 뭐라 말하며 건네줘야 자존심이 안상할까? 점심시간이
되자 배낭에서 도시락을 끄르지도 못한 채 나는 종내 그 아이의 눈치만 살폈다.
그 때 그 아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김밥 같이 먹자. 나도 오늘 밥 싸왔어."
한편으로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었다.
그 아이는 잔디밭에 신문지를 깔고 씩씩하게 양은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소풍 도시락에 당연히 들어 있어야 할 김밥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 기른 상추다!"
그 아이는 파란 상추에 보리밥을 얹고 그 위에 고추장을 바른 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입에 꽉찬 상추쌈을 우물우물 씹으며 그 아이가 말을 했다.
"한 개 싸 줄테니 너도 김밥 하나 줘"
"그래"
그 아이가 싸준 상추쌈은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다.
"엄마 병이 좀 나았어. 나도 내년 봄소풍에는 김밥을 싸올 수 있을 꺼야"
"상추쌈이 더 맛있어. 내년에도 싸 와"
"그런데 우린 내년에도 같은 반이 될 수 있을까?"
그 아이는 겨울 방학이 되기 전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머니가 병고 끝에
돌아 가셔서 동생들과 함께 고향의 작은 아버지 집으로 내려간 것이다.
나는 초록색을 좋아한다. 하지만 상추의 초록색은 나에게 슬픈 소품이다.
나는 오랫동안 상추를 입에 대지 못했다. 사실 그 아이 이름은 내 기억속에
또렷하게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김밥을 500개도 넘게 사먹을 수 있는 튼튼한
청년으로 자라 있겠지.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글 : 허순덕님